과학 논문 작성 과정에 관한 고찰
전산학과 박사과정
김창대
초록
논문이란 의미가 있는 걸까? 졸업 말고. 사람들은 왜 논문을 못 써서 안달인 걸까? 박사 4년차가 되어 일저자 논문은 처음인 깜냥에, 나는 되려 의미를 못 찾아 논문을 못 쓰고 있었노라고 항변한다. 처음엔 논문을 읽는 것이 신기했고 쓰는 것은 뿌듯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논문의 아이디어는 다 거기서 거기고, 실험도 겨우 틀어막은 것들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논문을 기반으로 과학은 발전하고 있다. 실생활마저 급격히 바꾸고 있다. 결국 나는 정보화 사회의 부품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논문의 의미는 이것이 합쳐져 이룰 거대한 세상에 대한 상상력에 근거를 둬야 한다. 초록을 너무 대충 썼나... 뭐, 읽고 싶은 사람은 본문을 읽겠지.
영문 초록
Are papers meaningful? Except for the degree. Why people are eager for writing papers? Give up. I am not good at English. My major is Computer Science, not English. Why I should write in English? In fact, I know the answer, but, anyway, I don’t want to write an English abstract for this paper. Just read Korean below!
제1장. 서론
논문이란 의미가 있는 걸까? 졸업 말고. 하는 일도 없이 스트레스나 받으며 술이나 퍼먹다가 간기능과 바꾸어가게 되는 그 놈의 박사학위를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박사 하나 받는 다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대한 늬우스 시절에 다 끝났는데.
사람들은 왜 논문을 못 써서 안달인 걸까? 논문 하나 쓴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도 않으며 벤처 기업 하나 차리는 것도 아니며 작가들처럼 소소하게 목돈 한 번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뿌듯해하며 부모님께 두 손 쭉 뻗어 논문을 내밀어봤자 “이게 뭐다냐. 박사는 언제 되는 것이여?”라고 말씀하실 것이 뻔한데. 뭔지는 몰라도 수고했다며 오리고기에 쌈무 한 번 차려주시겠지만.
그래, 누구는 논문을 많이 써서 교수가 되고, 누구는 논문을 많이 써서 해외 유명 기업에 취직하고, 누구는 논문이 대박 나서 벤처 기업을 차렸다더라. 하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어느 지역에나 카이스트 가는 학생이 한 명쯤은 나오지 않던가. 하긴,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그러나 결국엔 피라미드의 조금 높은 부분 벽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나마 한 두 층 높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교수가 있고, 해외 유명 기업엔 무수히 많은 노동자가 있고, 또 무수히 많은 벤처 기업들이 있다. 우리는 평범해지기 위해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박사 4년차나 되어 첫 번째 일 저자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주제에 이런 질문을 던질 깜냥은 아닐 터다. 그러나 논문의 의미를 못 찾았기에 아직까지도 논문을 쓰지 못했노라고 항변하련다. 그러면 지금은 왜 논문을 쓰고 있냐고? 당연히 졸업 때문이지. 이제 다시 첫 번째 문단으로 돌아가 볼까? 그래, 논문을 쓰면서도 이쯤 해서 첫 번째 문단으로 돌아가곤 했다.
논문. 영어로는 paper라고들 부른다.[1] 졸업 논문은 thesis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것은 아직 내가 생각도 못할 신성한 것이고, 어쨌든 paper다. 영어사전에서 paper의 1번 뜻은 당연히 종이, 2번 뜻은 신문, 3번 뜻은 편지나 개인적인 자료 등의 서류, 그리고 6번에 가서야 논문이다. 공통점은 간단하다. “종이” 자체로의 기능을 할 때가 가장 많은 물건이라는 것이다. 하루 뒤적거리고 나면 짜장면 쟁반으로 쓰이는 신문지, 한 번 읽혀지면 서랍을 서랍답게 하는 기능만 하는 편지와 개인적인 자료들, 그리고 한 번 끝까지 읽혀지는 일도 거의 없을, 내 불쌍한 논문.
처음으로 선배를 도와 논문을 썼던 기억이 난다. 석사 1년차 때였다. 교수님과 선배가 둘이서 논쟁할 때, 아니 사실은 교수님만 열심히 말씀하시고 선배는, 네, 네, 혹시 이건 어떨까요? 네, 그렇죠, 라고 대답하던 그 때가 생각난다. 교수님과 학문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선배가 위대해보였었다. 선배는 뭔가 의견을 내고 있는데, 나는 머리만 어지러웠다. 교수님 방에서 나오면 선배가 날 따뜻하게 바라보며 “처음엔 다 그래”했다. 정말 처음에만 그랬다. 조금씩 교수님 말씀을 알아듣게 되었을 땐 정말 뿌듯했다. 나도 ‘혹시 이건 어떨까요?’를 말하게 되었을 땐 심장이 떨렸다. 논문에 내가 생각해낸 내용이 두 문단이나 들어가게 되었을 땐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미니홈피에 올렸다. 지리하게 실험 결과를 정리하고 쪼잔하게 그래프를 다듬으며 밤을 지새울 때도 뿌듯했다. 어쨌든 나도 논문에 무언가를 보태고 있었으니까. 선배의 모니터나 내 모니터나 학교 밖 친구들 데려와서 보여주면 다 똑같아 보일 테니까.
논문이 accept되어 세상에 나왔을 땐, 분명 행복했다. 두 번째긴 해도 내 이름이 박혀 있는 논문이었으니까. 물론 과정이 힘들긴 했다. 하지만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무어가 있겠는가, 어차피 다 힘들다면 내가 재미있고 뿌듯한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업으로 삼아야겠다 싶었다. 자신감도 생겼다. 미팅에서 말을 더 많이 꺼내게 되었고 다른 선배들과도 디스커션을 자주 했다. 나와 대화하던 선배들은 때론 내 시선이 예리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에이, 선배님에 비하면야 새 발의 피고 북한의 고기반찬이죠.”라며 겸손을 떨었지만, 내심은 거만했다. 그래서였다.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석박사 통합과정에 진학해서 대학원생활을 조금이나마 빨리 끝내려고 한 건.
운이 거기서 다 했던 걸까? 그 때부터 모든 게 막히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내는 모든 것들이 이미 논문으로 나와 있었다. 내 아이디어를 신통해하며 자리로 돌아갔던 선배들이 정작 내 아이디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이것저것 연구하려 하다 보니 아는 건 많아졌지만, 정작 어느 것 하나 깊게 알지 못해서 연구를 시작하기가 힘들었다. 실험 장비,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게 없었다.
박사를 받으려 했던 게 실수였을까? 그렇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발버둥 쳐왔더랬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는 가장 나은 일이었다고 상대우위라도 추구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절대평가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나에겐 다른 것들, 특히 육체나, 사회성을 동반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어렵다. 그래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 그리고 어떻게든 박사만 따면 먹고 살 수는 있다지 않은가. 공학박사는 시간 강사로 전락하는 대신 대기업의 부품이 되는 걸 선택할 수도 있는 참된 기능직 아니던가. 욕심 부리다 하우스푸어만 되지 않는다면, 자식들이 친구들 만날 학원 정도는 보내줄 수 있을 만큼의 돈은 벌 수 있다지 않은가. 이 정도면 절대우위도 꽤 있는 거지. 우리 할아버지가 재산가는 아니니까.
그래, 후회란 게 싫어서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후회하기 싫다. 내 선택은 옳아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 논문 작성이 끝날 때까지 논문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어쩌면 내 삶의 의미를 못 찾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논문 하나를 쓰기 위해 살아왔으니까. 어쩌면 20대 전체를.
그래서 과학 논문 작성 과정에 대해 고찰해보려고 한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논문 읽기이다. 그것을 2장에서 다룰 것이다. 그리고 나면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3장에서 다룰 내용이다. 그 다음에 실험을 하고 평가를 한다. 그것을 4장에서 다루고, 5장에서 결론을 내려고 한다.
제2장. 관련 연구
정찬용은 아기가 언어를 익히는 과정을 무수히 들은 것을 따라하는 것이라고 했다.[2] (사실 뉘앙스는 비슷하지만 정확히 저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베꼈다간 표절시비나 붙을 테니 인용이라는 이름으로 왜곡을 가미하자. 내 논문에서 표절을 찾아낼 만큼 내 논문을 열심히 읽어줄 사람도 없겠지만. 그리고 저게 인용한 책의 핵심 주제도 아니며 저 책에서 처음 나온 아이디어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3]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니니 제발 좀 믿어달라는 게 “관련 연구”장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걸.) 어쨌거나 논문도 학자들이 사용하는 하나의 언어라고 볼 수 있으므로,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많이 읽어야만 할 것이다.
또, 논문에는 새로워야한다는 강박이 있다. 새롭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무엇이 연구되어 왔는지 알아야만 한다. 모든 걸 안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to the best of our knowledge”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니 논문을 많이 읽어야 한다.
따라서 내 논문 쓰기 과정이 논문 읽기로부터 시작된 것도 당연하다. 때는 학사과정 졸업연구를 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학사과정 졸업연구를 연구로 쳐주지 않는 사람(주로 박사과정 이상)들도 있을 것이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을 첫사랑이라 쳐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하지만 그대가 초등학교 첫 사랑 이후 주욱 솔로였던 사람이라면, 자신을 모태솔로라고 칭하고 싶겠는가? 그러니 이 이야기도 참아주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참고문헌 몇 개가 더 늘어날 것이니까, 당신은 참아야만 한다.)
졸업연구를 위해 교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논문 2개를 건네주셨다. 연구 주제와 관련이 있으니 읽어보라고 하셨다. 영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12쪽. 서너 시간이면 다 읽겠거니 싶었다. 영어를 잘은 못하지만, 공대 교재들은 잘 읽어 내려가는 실력이니까. 하지만 세 시간 뒤, 나는 뭔가 심각히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아직 첫 장을 넘기지 못 했다. 모니터에는 용어를 검색해본 페이지만 열 개도 넘게 띄워져 있었다. 메모장엔 이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은 논문 제목 3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엎드려 잔 상태라 팔이 저렸다. 내가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논문을 읽어봐야 하는지가 궁금해져서, 구글스칼라[4]에 키워드를 넣어보았다. <Deterministic replay> 전혀 일반적인 단어가 아닌데도 검색 결과는 10,000개가 넘었다. 논문이 아니라 불로초부터 찾아야할 지경이었다.
일주일 뒤 교수님을 찾았다. 논문 하나를 겨우 읽어낸 다음이었다. 죄송하게도 논문을 하나 밖에 못 읽었다는 나에게, 교수님은 “논문 하나 읽는데 30분을 넘기지 마세요. 정말 자세히 읽을 논문이 아니면.”이라고 점잖게 말씀하셨다. 교수님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은 것이 “How to read a paper”[6]라는 논문이었다. 그 논문에서는 “three-pass method”라는 것을 제안했다. 논문을 집으면 먼저 서론만 빠르게 읽은 뒤, 나머지 부분은 그림과 그래프만 훑어보라는 것이다. 그 다음, 더 자세히 읽을 논문일 때만 “second pass”나 “third pass”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해 나가라고 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게 이 논문에서 이야기하는 “first pass”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비법은 비범한 사람들의 것이다. 나도 30분 내로 읽어내겠노라고 비상(非常)한 집중력을 모으고 논문을 집어 들어 봤지만, 비상(飛上)하지 못했다. 30분 뒤엔 겨우 세 번째 문단이었다. 역시 모니터엔 위키피디아[7]가 몇 개 띄워져 있었고, 내가 가입한 온갖 카페와 클럽들도 띄워져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논문이 신기했다. 어린 시절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잠자리 한 마리를 콕 잡아 채집함에 넣어두고 신기해하며 바라보던, 그런 느낌이었다. 일주일이 걸리더라도 논문을 이해하고 나면 뿌듯했다. 그리고 4일, 3일 만에 논문 하나를 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키가 쑥쑥 자라는 느낌이었다. 1년 반 정도가 지나고, 마침내 30분에서 1시간이면 논문 한 편의 대강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그 땐 성장판이 닫히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 때부터인 것 같다. 내가 논문을 읽지 않기 시작한 것은. 논문 스터디에 들어가면서도 논문을 더 이상 출력해가지 않게 된 것은. 마음만 먹으면 주요 학회와 저널 논문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은. 드디어 날개를 달고, 나는 걸었다. 여전히 일주일에 많아야 한 편 정도를 읽었다. 내 연구 주제와 관련된 논문만 읽었다. 조금만 새로운 주제가 나와도 두려웠다.
그러다가 다시 논문을 30분에 하나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때가, 바로 “관련 연구”장을 쓰면서였다. “관련 연구”장이 너무 짧거나 “참고 문헌” 개수가 너무 적으면 공부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리고 교수님이 논문을 쓰실 때 그토록 그림과 그래프에 집착하셨던 이유를 깨달았다. 모두가 나처럼 허겁지겁 “first-pass”만을 지나갈 테니까. 광고가 30초의 예술이듯, 논문도 30분 내로 이해시키지 못하면 인용 받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서글퍼졌다. 그 사람들도 분명 이십여 년의 공부를 배경삼아 몇 년간 치열하게 노력한 끝에 논문을 썼을 텐데, 나는 그걸 한 두 문장, 길어야 한 문단으로 요약해버렸다. 한 질의 책도 모자랄 만큼 구구절절한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남아있는 것은 단 한 줄의 묘비명인 것처럼.
원래는 (원래가 원래인지 이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련 연구”가 이 논문을 통해 이 주제를 처음 접할 사람들을 안내 해야 하는 것일 게다. 내가 연구를 시작할 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도 어떤 논문의 “관련 연구”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는, 나는.
어쨌거나 나는 많은 논문을 읽어냈고, 어쨌거나 “관련 연구”장도 써냈지만, 이내 가장 큰 벽에 부딪혔다.
제3장. 기막힌 아이디어
기막힌 아이디어는 사실 그냥 기가 막힌다. 그리고 귀가 막힌다. 어떤 비평도 듣기 싫어진다. 그리고 정말로 기가 막힌다. 이것을 훌륭하다고 우겨야 하는 현실이 너무 비참해진다.
이번 논문을 시작한 건 2년여 전이었다. 나는 드디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었다. 아르키메데스처럼 발가벗고 뛰쳐나오진 않았어도, 샤워하다가 났던 그 생각을 까먹을까 허겁지겁 닦고 나왔었긴 했다. 속옷만 입은 채로 후다닥 메모부터 했었다. 정말 그럴 듯 했다. 실험만 하면 결과가 예상대로 짜자잔 나올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논문들을 검색해 보았지만 다행히도, 다행히도 그 어느 논문과도 똑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내용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2년 동안 내 아이디어가 교수님[5]의 생각으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왔다. 내 아이디어는 키워드만 남아있다. 교수님이 옹고집 부리신 거라면 좋으련만, 오히려 내 옹고집을 꺾느라 교수님께서 고생하신 결과다. 내 아이디어가 그 어느 논문에도 나오지 않은 것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가 나쁜 것이기 때문이었다. 키워드라도 남겨 여기까지 연구를 진행시켜 주신 교수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 짬밥을 먹긴 좀 먹었나보다. 교수님이 허락하셨으니 논문을 쓰기 시작하긴 했지만, 논문이 필요해 논문을 쓰기 시작하긴 했지만, 이런 아이디어로 논문을 써도 되나 싶다. 최근에 나온 논문 a, b, c, d에서 풀려고 시도했던 문제 P가 있는데, 이것을 좀 더 오래된 논문 e에서 사용한 방법 M을 사용해서 풀면 결과가 좋아진다는 것이 내 논문의 요지다. 잠깐, 아이디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건가?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다른 논문들을 살펴봐도 다 똑같다는 것이다. 고급용어로 돌려막기다. 돌려막으면서 논문 개수는 점점 더 불어나고, 박사가 양산된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8]는 말이 성경에 나온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교회에 다니고 싶어졌다. 빅뱅 이후에 새 것은 없다. 하다못해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도 98%가 똑같다지 않는가.
논문도 98%가 이전 논문과 동일하고 2%가 다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2%밖에 안 다른 인간과 침팬지가 엄청나게 달라 보이는 것처럼, 논문들도 엄청나게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강산이라도 변한 듯이 변모해있다. 물론 강산이 변해도 산은 늘 거기, 강도 늘 거기 있는 것처럼, 논문도 그냥 다 거기 있지만.
2%를 100%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과학 논문의 과학일 것이다. 2% 다른 주제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이며, 기존의 것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인간처럼. 그런 면에서 논문은 현실주의 문학[9]이다.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하고, 철저하게 현재를 비판하면서, 철저하게 꾸며져 있다. 논문을 많이 쓰는 이들을, 나는 그들의 글 솜씨로 인하여 존경한다.
사실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도 논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나는 이제껏 “연구 이외의” 쓸 모가 있는 논문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물론 나의 지도교수님[5]은 “연구는 5년 혹은 10년 앞을 내다보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검증되는 기술들이 실제 현실에 반영되는 것이고요.”라며 논문들을 옹호한다. 그 말 자체에 토를 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토를 달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정도면 엄청 친절한 교수님 아닌가? 교수님, 보고 계신가요?) 하지만 내가 본 대부분의 논문들은 분명히 5년 뒤엔 사라져야 마땅한 기술들을 개선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게 무슨 생명체도 아니거늘, 절대로 호흡기를 떼지 않고 이따금 전기충격을 가한다. 실용성이라곤 보이질 않는 것들을 “요즘 많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연구한다.
물론, 단 2%만 달라도 충분한, 쓸모조차 없어도 되는, 그런 아이디어마저 내 머리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학사과정 졸업연구, 그리고 석사 1년차 때의 그 두 문단, 그것이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새로운 것의 끝인 것 같다.
다 필요 없고, 사실, 이 소설이 그렇다. 요즘 주변에서 다들 논문을 쓰고 있으니까, 논문이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소설이란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논문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은가. 논문의 의미도 모르면서, 아니, 논문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 소설의 가장 새로운 점은 “논문 작성에 대한 논문 형식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논문 작성에 대한 논문 형식의 에세이”마저 이미 나와 있다.[10] 그러니 별 새로울 것도 없다. 게다가 이미 문학작품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논문 쓰기에 대해 갈등해왔을 것이며, 그 중에 논문 형식으로 된 것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리고 이 소설이 실생활에 무슨 의미를 갖는지도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아, 내가 이 소설은 왜 쓰고 있는 것인가. 이 소설은 5년 뒤, 10년 뒤를 내다본 것이라는 핑계조차 댈 수 없는 걸. 아닐 수도 있겠다. 5년 뒤, 10년 뒤에도 무수한 사람이 논문 작성에 열을 내고 있을 테니.
어쨌거나, 나는 논문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교수님이 허락하신 아이디어니까, 실험도 했다.
제4장. 실험과 평가
실험은 밀당이다. 더 시키려는 자와 덜 하려는 자 사이의 지루한 싸움이다. 숫자 하나, 단어 하나를 추가시키기 위해 며칠은 기본, 심하면 몇 달이 더 걸린다. 그리고 나는 빨리 졸업하고 싶다.
교수님과의 밀당이라기 보다는 가상의 리뷰어와의 밀당이다. 하긴, 가상의 리뷰어는 교수님의 입에만 존재하니 결국 교수님과의 밀당일지도. 더 시키려는 자의 논리는 이렇다. 실험을 통해 기막힌 아이디어가 정말 실현 가능하고 재현 가능한 것임을 보여야 하다. 그러려면 이런 저런 가정들을 제거해서 더 현실적인 실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또, 많은 횟수의 실험을 한 후 평균과 분포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일단 아이디어가 현실적이지 않다. 이론뿐이다. 그리고 내가 가까스로 만들어 낸 바로 이 환경에서만 동작한다. 실험 결과가 하도 안 나와서 정말로 교회에 발을 들일 뻔 했단 말이다. 여기서 환경에 현실성을 더하라는 건, 아니 털끝만 건드린대도 나는 싫다. 분명히, 괴상망측한 결과가 나올 게 뻔하다. 비록 지금은 “실험은 이런 환경에서 했다. 하지만 내 아이디어는 다른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통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는 중이지만, 그게, 참, 그렇다. 연구란 걸 ‘세상 아무도 모르는 것을 내가 알아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난 참 연구자다.
더 많은 횟수의 실험에 관해서는, 음, 나는 자고 싶다. 일주일 넘게 종일 연구실에만 있는 중이다. 새벽 3시도 넘어서 들어갔다가, 눈 뜨면 바로 연구실로 향한다. 아침은 샌드위치로 때우고, 점심도 때를 놓쳐 느지막이 라면 한 그릇 먹는 일이 잦고, 그러다보니 밤 9~10시나 되어 치킨 한 마리 시켜 먹기 일쑤다. 왜 학교 근처 치킨집들이 양념치킨에 뜬금없이 밥을 같이 배달해주는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엔 깨닫지 못했었다. 그나마 같이 먹어줄 친구가 있을 때나 치킨도 먹는다. 그냥 삼각김밥 두 개에 우유 하나 같은 “매점 정식”을 먹을 때도 많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자라날 동정이 너무 부담스러워 고백하자면, 솔직히 나는 실험도 더 할 수 있고 잠은 이미 자고 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일주일 넘게 종일 실험실에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종일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험과 동시에 미드(미국 드라마)를 시작했다. 실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보기에는, 한 회에 20분 정도인 미드는 매우 적절하다. 게다가 영어로 되어 있어 놀고 있지만 놀고 있지만은 않은 느낌도 준다. 물론, 한글 자막을 늘 깔아 놓지만. 미드를 보다보면 시간은 20분 단위로 흘러갔다. 때로는 실험이 끝나고 나서도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 하느라 1시간이나 늦게 결과를 확인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보는 예능 프로그램도 늘었다. 긴 실험에 좋다.
눈 뜨고 바로 실험실로 향하는 것도 맞긴 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11시쯤일 따름이다. 시간이 애매해서 샌드위치를 사오는 것뿐이다. 샌드위치를 그냥 먹긴 아쉬우니 예능을 틀어놓고 먹기 시작하면 바로 1시간이 흐르고, 실험 결과를 잠시 확인하다가 페이스북을 좀 하다보면 학교 식당 점심시간이 이미 지나있다. 그래서 라면을 먹으러 가는 것이다. 에이, 관두자. 동정이 부담스러운 건 둘째 치고 너무 쪽팔린다. 아니, 그보다, 만에 하나 교수님이 보실라.
그래, 내가 이 모양이어서 박사 4년차나 돼서야 일저자 논문을 겨우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 많은 시간을 논문을 읽거나 다른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 난 위대한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멍 때리고만 있었어도, 그동안 자유로이 움직이던 뇌 회로들이 이런 저런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논문이 아무리 완벽하게 이성적인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쓰는 나는 감정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나는 기계가 아니다. 늘 머리가 일정한 속도로 도는 것도 아니고 항상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미셸 뜨루니에가 말한 대로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11]
나도 법정기준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은 채워야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찾아보니 “법정기준근로시간”이란 하루에 일을 해도 되는 “최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최소”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닌 걸 발견하고는 그만 두었다.[12]
논문을 쓴다는 것은, 소설을 쓴다는 것과 같다. 세상의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열심히 고찰하고, 그 결과를 글로 나타내는 것이다. 소설가는 실험은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모르시는 말씀. 소설가가 얼마나 열심히 취재를 다니는데. 그리고 소설가도 하루 종일 눌러 앉아 글만 쓰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로 놀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그제야 글을 쓰는 것이다. 쓰다가 막히면 또 논다. 그러다 또 쓴다. 비슷한 일을 하는데 나도 그래도 되지 않겠는가? 이럴 때 보면 머리는 참 좋은 것 같은데 말이지.
물론 통장에 인건비가 들어올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회사에 다니는 만큼 돈을 많이 받는 건 아니지마는, 회사보다도 훨씬 훨씬 덜 일하니까. 아침에 부모님이 거신 전화를 자느라 받지 못했을 때도 죄송하다. 부모님은 내 등록금 대시느라 아침 일찍부터 일하시는데, 나는 서른 줄에 접어들고서도 철이 들지 않은 것 같아서. 그리고 나도 안다. 제아무리 아이디어가 중요하다해도, 결국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 없이는 논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소설가가 취재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실험하는데 쏟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논문을 쓰다가 사랑을 잃었다. 처음엔 불규칙한 식생활을 걱정해주던 그녀는 결국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날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논문 이야기를 하느니 차라리 군대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난 전문연구요원인데, 그러니까 논문을 쓰는 게 군생활인데.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내 직업인데. 그리고 그녀는 떠나갔다. 이게 논문이었다면, 이런 흐름에도 맞지 않는 문단은 삭제 당했겠지. 하지만 내가 논문만 쓰지는 않는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
너무 자세하게 핑계 댄 것 같지만, 본디 “실험과 평가”장은 최소한의 실험을 가지고 최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양을 늘리는 것이다.
제5장. 결론
논문은 의미가 있는 걸까? 지난 논문과 다를 바도 없고 겨우겨우 증명해낸 사소한 논리 따위가 정말 의미가 있는 걸까? 단언컨대 의미가 없다, 고 말하기엔 과학은 너무도 발전했다. 항상 그 자리인 것 같은 논문을 기반으로, 과학은 우리 실생활마저 너무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논문은 원소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원소가 모여 세포가 되고 세포가 모여 사람이 되지만, 아무도 ‘원소’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람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원소’에 대한 논문에서 ‘이것은 사람을 이루는 구성 물질이니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원소’ 자체에 대해 논할 것이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 되었다. 논문의 의미를 찾다니.
찰리 채플린은 영화 “Modern Times”[13]에서 인간이 철저하게 부품화되어버린 산업사회를 풍자한다. 사람이 사람을 위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부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보화 사회가 되고, 사람들이 사람을 위한 지식을 만들기 위해 다시 부품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찰리 채플린과 나의 차이는 2차 산업에 종사하느냐, 3차 산업에 종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고 부품이 되어버린 사람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단순 노동을 하고 있는 찰리 채플린은 분명 무언가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공사판을 다녀와서 “한강대교 내가 지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의 하루는 의미 있다. “하루 종일 시멘트만 발랐어.”라고 말하는 사람의 하루는 의미 없다. ‘원소’를 생각하며 ‘사람’을 떠올릴 수 없다면 의미 없는 사람이다.
그래, 논문에 대한 의미를 찾을 정도로, 나는 논문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을 뿐이다. 하긴, 모두가 논문만 이야기하는 대학원에서 그러지 않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면 어떡하지? 역시 교회를 가야 하나.
어쨌거나, ‘논문’하면 떠올려야 하는 것은 ‘과학 발전’이니까, 난 이제 ‘과학 발전’의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물음을 위해 우리에겐 “future work”이라는 마법 같은 단어가 있다. 다음에 연구하겠다고 해놓고, 언제 할 것인지는 말하지 않으면 된다. 뭐, 다음에 쓸 거리 없는 사람들이 쓰겠지.
그런데, 이걸로 졸업을 할 수는 없을까?
참고 문헌
[1] 네이버 영어사전. 논문을 쓰면서 그 어떤 다른 논문들보다 자주 뒤적거리는 것. 제길, 논문은 왜 영어로 써야 하는 거야?
[2] 정찬용.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 사회평론. 1999년. 16-17쪽. 10년 전에 읽은 뒤, 거들떠도 안 보다가 이번에 20여 쪽을 훑어보았다.
[3]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출판 연도, 출판사 미상. 나는 표절이 두렵다.
[4] http://scholar.google.co.kr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존재한다.
[5]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나의 지도교수님. 교수님이 이 글을 보면 안 되는데...
[6] S. Keshav. 2007. How to read a paper. SIGCOMM Comput. Commun. Rev. 37, 3 (July 2007), 83-84.
[7] http://en.wikipedia.org/ 정말 많이 참고하지만 참고문헌에는 넣을 수 없는 문헌.
[8] 성경 전도서 1장 9절 하반부
[9] http://www.norway.or.kr/News_and_events/press/travel/4/Norwegian-Maters/---The-Playwright-Henrik-Ibsen/--Ibsen-and-Realism/#.UnSr0vlT4aw 혹시 이런 말이 있을까 싶어 찾아봤는데 정말 있다. 참 다행이다.
[10] Roy Levin and David D. Redell. An Evaluation of the Ninth SOSP Submissions; or, How (and How Not) to Write a Good Systems Paper. ACM SIGOPS Operating Systems Review, Vol. 17, No. 3 (July, 1983), pages 35-40. 같은 내용이 다음에도 게재됨. SIGGRAPH Comput. Graph. 22, 5 (October 1988), 264-266.
[11] 프랑스 작가 Michel Tournier. 다음 강연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 김영하,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 TEDxSeoul 2013. http://www.ted.com/talks/lang/ko/young_ha_kim_be_an_artist_right_now.html
[12] 대한민국 법률 제11270호. 근로기준법 제 50조. (2012.2.1. 일부개정)
[13] Charlie Chaplin, Modern Times - Factory Scene (HD - 720p). 1936. Available at https://www.youtube.com/watch?v=tfw0KapQ3qw
심사평
가벼움을 가장한 형식 속에 진지한 고민이 배어
“김창대의 ‘과학 논문 작성 과정에 대한 고찰’은 단독 저자 논문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논문을 쓰는 행위가 자신이나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하는 물음, 즉 학위 취득의 수단이란 것 외에 자신은 왜 논문을 쓰는가, 자신의 논문이 의미는 있는 걸까를 묻는 작품이다. 카이스트 안에서의 학업과 일상을 소재로 이공계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묻는 계열의 작품으로서 보통 이 부문의 작품이 제일 디테일이 살아 있고 진정성도 전해지곤 했다. 과학 논문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고통 앞에서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초록부터 참고문헌까지 과학논문의 구성 형식에 맞춰 써낸 김창대의 작품은 재기 발랄하고 뚜렷한 주제의식을 보여주어 신선했다. 즉 가벼움을 가장한 형식 속에 작가 자신의 진지한 고민이 배어 있는 작품이었다.”
-이상경 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
작가 후기
저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에요
"저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에요. 논문 쓰기가 싫었거든요. 힘들고 어려워서요. 주변에선 다들 논문에 안 써진다고 술 마시고 논문 떨어졌다고 술 마시고 논문 붙어도 술 마시는데, 나는 왜 거기 붙어서 술을 마시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고민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어요. “논문은 의미가 없다”라는 결론이 나올까봐 조마조마하면서요. 솔직히 결론은 약간 우긴 거예요. 아직 논문 하나를 보면서 거대한 과학발전을 떠올리진 못하거든요. 또 거대한 “future work”도 남아있고요.소설은 “마음을 울리는 대놓고 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제 소설이 생각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나봐요. 제 친구들이라 SNS에 올려주는 줄 알았는데, 일면식 없는 분들도 많이 읽고 공감해주시네요. 같은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어서 “카이스트문학상”에 냈던 건데, 그보다는 더 멀리 퍼진 것 같아서 행복해요.
논문의 의미보다도 소설의 의미를 먼저 찾아버린 것 같아요. 이래도 될까 싶네요. 그래도 전 박사과정 학생이니까, “머리를 울리는 철저한 참말”도 쓸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겠죠. 논문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분들, 더 좋은 미래에서 만나요."
-김창대, 2014년 3월5일
출처 : http://scienceon.hani.co.kr/151818
너무 공감되네요..
이것저것 해본건 많지만.. 뭐하나 제대로 하는것이 없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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